밤 열한 시, 스탠드 불빛 아래 낡은 종이책 한 권과 방금 충전을 마친 전자책 리더기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집어 들지 잠깐 망설이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질문 하나와 마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담긴 이야기를 더 오래, 더 깊이 기억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전자책 플랫폼의 매출은 해마다 두 자릿수로 늘고 있고, 출판가에서는 종이책의 위기를 이야기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동네 서점 앞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줄을 서고, 20대 사이에서는 오히려 종이책을 손에 드는 것이 하나의 감각적인 취향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종이책은 정말 사라지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다른 방식으로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종이와 활자가 걸어온 오래된 길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목차
1. 종이책의 시작, 천 년 동안 이어진 종이의 역사
종이는 서기 105년 무렵 중국 후한의 채륜이 제지 기술을 개량하면서 세계로 퍼져 나간 기록 매체입니다.
물론 채륜 이전에도 나무껍질이나 삼베 조각으로 종이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학계에서는 채륜을 종이의 '발명가'라기보다 '개량자'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다듬어진 제지술은 실크로드를 따라 이슬람 세계로 건너갔고, 그곳의 학자들 손을 거쳐 다시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종이가 유럽에 뿌리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천 년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15세기 중반,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완성하면서 책은 비로소 소수 성직자와 귀족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은 구텐베르크의 성서가 아니라 고려 말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점입니다.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선 기록입니다.
저는 몇 해 전 청주고인쇄박물관을 답사한 적이 있는데, 직지의 복원본을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손바닥만 한 활자 한 알 한 알에 새겨진 정성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종이 한 장이 지식을 얼마나 멀리, 얼마나 오래 실어 나를 수 있는 그릇이었는지 새삼 실감이 났습니다. 그 작은 활자들이 결국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쥔 전자책 리더기의 아주 먼 조상이라는 생각을 하니, 기술의 형태는 바뀌어도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사람의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2. 전자책의 탄생,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에서 킨들까지
전자책의 출발점은 1971년 미국의 마이클 하트가 시작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마이클 하트는 미국 독립선언문을 컴퓨터에 입력해 여러 사람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공유한 것을 시작으로, 저작권이 만료된 고전 문헌을 디지털 텍스트로 변환해 무료로 배포하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운영되는 세계 최초의 디지털 도서관,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의 뿌리입니다. 다만 이때는 아직 '읽기 편한 기기'라기보다는 '텍스트 데이터'에 가까웠습니다.
전자책이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의 형태를 갖춘 것은 2004년 일본 소니의 리브리에가 처음이었고, 이를 대중적인 문화로 끌어올린 것은 2007년 아마존이 선보인 킨들이었습니다.
화면 자체가 종이처럼 눈부심 없이 읽히는 전자잉크 기술과, 수천 권의 책을 손바닥만 한 기기 하나에 담을 수 있다는 휴대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이후 스마트폰 and 태블릿이 보편화되면서, 이제는 별도의 리더기 없이도 누구나 손안에서 전자책을 펼쳐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3. 종이책과 전자책 독서율 변화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성인의 종이책 독서율은 28.8퍼센트, 전자책 독서율은 17.8퍼센트로 나타났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를 좀 더 길게 놓고 보면 흐름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성인의 종이책 독서율은 2013년 71.4퍼센트에서 십여 년 사이 절반 넘게 줄어들었고, 반대로 전자책 독서율은 완만하게나마 자리를 넓혀 왔습니다.
| 구분 | 2013년 | 2023년 | 2025년 |
|---|---|---|---|
| 종이책 독서율(성인) | 71.4% | 32.3% | 28.8% |
| 전자책 독서율(성인) | 13.9% | 19.4% | 17.8% |
2025년 수치만 막대로 단순화하면 격차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 2025년 조사에서는 20대의 전자책 독서율(59.4%)이 종이책 독서율(45.1%)을 앞질렀습니다.
전체 세대에서는 여전히 종이책이 우세하지만, 가장 젊은 세대에서는 이미 역전이 일어난 셈입니다.
그렇다면 전자책 시장 규모도 이런 흐름을 따라 계속 커지고 있을까요. 국내 전자책 시장은 2014년 3,820억 원 규모에서 2023년 1조 3천억 원을 넘어섰다는 조사가 있을 만큼, 연평균 15퍼센트가 넘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오디오북까지 새로운 독서 방식으로 자리 잡아 가는 모습을 보면, 지금의 독서 생태계는 종이와 화면, 그리고 목소리라는 세 갈래 길로 나뉘어 넓어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4. 종이책과 전자책, 기억력은 정말 다를까
노르웨이 스타방에르대학교 안네 망겐 교수 연구팀의 2013년 논문에 따르면, 사람은 화면보다 종이로 읽을 때 이야기의 내용을 더 안정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다만 연구마다 결과에는 차이가 있으며, 읽는 목적과 독자의 연령, 기기의 특성에 따라 화면 독서와 종이 독서의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연구도 함께 보고되고 있습니다.
연구팀은 노르웨이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 72명을 대상으로 같은 글을 종이와 화면(PDF)으로 나누어 읽게 한 뒤 내용 이해도를 비교했는데, 종이로 읽은 학생들의 성적이 유의미하게 더 높았습니다.
학계에서는 그 이유를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생기는 '공간적 감각'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 지금 읽는 부분이 책 전체에서 어디쯤에 있는지 손끝과 눈으로 동시에 확인하는 경험이, 내용을 기억 속에 붙잡아 두는 데 도움을 준다는 설명입니다.
스마트폰으로 읽을 때 독해력이 낮아진다는 국내 연구 보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화면 독서가 뇌의 전두엽 활동을 오히려 분주하게 만든다는 결과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연구 결과를 두고 화면 독서 자체가 열등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짧은 정보를 빠르게 찾거나 검색하는 데는 전자책의 하이라이트와 검색 기능이 오히려 유리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어떤 매체가 더 우수한가'보다 '어떤 목적에 어떤 매체가 더 알맞은가'로 질문의 방향을 옮겨가는 추세입니다.
저 역시 장거리 출장길에 전자책 리더기 하나만 챙겨 다닌 시기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짐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에 만족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도 책의 내용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의 감각이 없다 보니 방금 읽은 문장이 책의 앞쪽이었는지 뒤쪽이었는지 헷갈리는 일이 잦았던 겁니다. 그 뒤로는 소설처럼 긴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 책은 종이책으로, 참고서나 실용서처럼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찾아야 하는 책은 전자책으로 나누어 읽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두 매체가 각각 잘하는 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 종이책 | 📱 전자책 |
|---|---|
|
✔ 기억에 오래 남음 ✔ 높은 몰입감 ✔ 소장 가치 ✔ 메모와 흔적 남기기 |
✔ 빠른 검색 ✔ 뛰어난 휴대성 ✔ 수천 권 저장 ✔ 즉시 구매 가능 |
5. 종이책과 전자책의 공존,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전문가들은 종이책과 전자책이 서로를 밀어내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쓸모를 나누어 맡는 방식으로 공존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실제로 최근 출판업계에서는 웹소설로 먼저 인기를 얻은 작품이 나중에 종이책으로 출간되어 다시 한번 판매고를 올리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전자책이 새로운 독자를 발굴하는 통로가 되고, 종이책은 그 이야기를 오래 소장하고 싶은 독자에게 마지막 도착지가 되어 주는 셈입니다.
환경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자책은 종이와 잉크, 유통 과정에서 생기는 자원 소모가 적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기를 만들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부담도 함께 따져 봐야 한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더 친환경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재생 종이 사용 확대와 전자 기기의 수명 연장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동네 헌책방에서 오래된 소설책 한 권을 우연히 집어 들었는데, 앞장에 이전 주인이 연필로 적어 놓은 짧은 메모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책이 나에게 오기 전까지 거쳐 온 시간과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전자책 파일은 아무리 여러 번 다시 다운로드해도 완전히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만, 종이책은 손때와 메모, 접힌 페이지 자국까지 끌어안으며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갖게 됩니다. 어쩌면 종이책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효율성이 아니라, 바로 이런 '흔적을 남기는 능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종이책과 전자책의 차이는 어느 쪽이 더 우수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용도의 차이에 가깝습니다. 종이책의 장점은 깊은 몰입과 소장의 즐거움에 있고, 전자책의 장점은 뛰어난 휴대성과 검색 편의성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독자들은 두 매체를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독서 도구로 함께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주 하는 질문 (FAQ)
Q1. 종이책 독서율은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까요?
전체 평균으로 보면 종이책 독서율은 지난 십여 년간 꾸준히 낮아지는 흐름을 보여 왔습니다. 다만 최근 조사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종이책을 향한 관심이 다시 살아나는 조짐도 함께 나타나고 있어, 하락세가 계속 이어질지는 학계에서도 단정하지 않고 지켜보는 분위기입니다.
Q2.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환경 보호에 더 도움이 되나요?
제작과 유통 과정만 놓고 보면 전자책이 자원을 덜 소모하는 편이지만, 전자기기의 생산과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부담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친환경적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사용 방식과 기기 수명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Q3. 아이들에게는 전자책과 종이책 중 어느 쪽이 더 좋을까요?
연령대와 학습 목적에 따라 연구 결과가 엇갈립니다. 상호작용 기능이 담긴 전자책이 흥미를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있는 반면, 긴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는 종이책이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도 함께 존재합니다.
Q4. 오디오북도 독서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도 오디오북 이용률을 종합독서율 산정에 포함하고 있어, 정책적으로도 오디오북은 독서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다만 시각적으로 텍스트를 읽는 경험과는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점은 참고할 만합니다.
마치며
채륜의 종이에서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로, 다시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의 디지털 텍스트에서 오늘날의 전자책 리더기로 이어진 길을 돌아보면, 기록 매체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계속 모습을 바꿔 왔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도 종이책은 늘 완전히 사라지기보다 새로운 형태의 이웃을 만나며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어쩌면 '종이책이 살아남을까'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오래 기억하고 싶은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급하게 정보를 찾아야 할 때는 전자책의 검색 기능이 훨씬 요긴하겠지만, 오래 곱씹고 싶은 이야기 앞에서는 종이 한 장을 손끝으로 넘기는 그 느린 감각이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으니까요.
기록의 도구는 시대마다 달라졌지만, 이야기를 오래 간직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이책은 사라지는 대신, 자신만의 자리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앞으로도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오늘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에 맞는 매체를 그때그때 골라 보는 작은 습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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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공신력 있는 역사적 사료와 학계의 통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가치 판단은 독자 개인의 영역임을 밝힙니다.
참고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2025년 국민독서실태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Project Gutenberg
- Mangen, A. et al., Reading Linear Texts on Paper versus Computer Screen (2013)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